▲식물조사와 동굴답사의 주역들인 한라산우회 회원들.한라산우회의 리더는 부종휴였다. 사진 가운데 안경낀 이가 부종휴. 사진 맨 오른쪽 앉아있는 이가 서재철씨(사진작가)다.
▲북제주군 애월 어음 빌레못굴에서 발굴된 유적을 살펴보고 있는 부종휴. 부종휴가 최초 답사한 빌레못굴은 당시 세계최장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생태계 보물섬 제주’그 百年의 기록<19>]만장굴.빌레못굴 등 제주동굴 개척자
각국 동굴학회 정밀조사 줄이어…학술적 조명
고고학에도 천착, 단칸방엔 고대 유물로 가득
만장굴의 실체는 현지에서는 ‘만쟁이거멀’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져오는 등 까마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왔으나 암흑의 공간인 동굴의 침입은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다.
만장굴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46년 부활절날이었다. 지하에 감춰져 있던 세계 최장(당시만 해도 그랬다) 만장굴의 실체가 부활절날에 되살아났다. 북제주군 김녕국민학교 교사 부종휴와 그의 제자들로 짜여진 ‘꼬마탐험대’ 30여명은 그로부터 다음해까지 4월까지 1년간 5차에 걸친 답사와 측량을 통해 7km에 이르는 굴의 전모를 밝혀낸다.
우리나라에서 동굴에 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1958년 경북 울진 성류굴이 처음으로 기록되고 있는 사실만 보더라도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모험은 실로 대단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만장굴은 발견후 오랜 시일 동안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61년에 이르러 중앙 일간지에 만장굴이 대서특필되면서 갑자기 일반의 관심거리로 떠올라 이듬해인 1962년에 김녕사굴과 더불어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당국은 이 동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세계적인 용암동굴이란 가치보다는 산업적인 이용에 관심이 더 많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인 1963년에는 한미합동의 미국인이 이 굴속에서 양송이재배를 한다는 명분으로 지금 관광객들의 출입구인 ‘제2입구’의 천정을 낙반시키고 2층굴의 밑굴까지 이르는 층층계단을 만드는 바람에 원형이 훼손되기에 이르렀다.
부종휴와 만장굴 답사에 참여했던 그의 제자들은 결국 당국에 굴내에서의 양송이재배를 반대하는 진정을 했으며 전문가들에 의한 비판도 잇따랐다. 양송이재배는 얼마못가 무위로 돌아갔다.
그후 만장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1966년 착수되고 뒤이어 같은해 4월에는 중앙일보와 경북산악회, 일본지하수연구회 등이 참가한 가운데 한일합동으로 실시됐다. 1967과 1968년에는 한국동굴협회에 의해 조사가 계속됨으로써 세계적인 용암동굴로 속속 알려지게 되었다.
만장굴 학술조사는 그후로도 계속됐다. 그때마다 조사단에는 부종휴가 참여했다.
만장굴에 대한 대규모 학술조사는 1977년부터 부종휴의 사후(1980년)인 1982년 8월까지 4회에 걸쳐 실시됐다. 조사는 한·일합동으로 실시됐으며 조사단 규모가 무려 3백여명에 이르는 대탐사였다. 이후 전 세계의 화산동굴학회에 의한 만장굴 조사가 줄을 이었다.
동굴에 대한 부종휴의 열정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1946년 만장굴의 발견은 서막에 불과했다.
1970년 성산읍 수산굴, 이듬해 서귀포 미악(米岳) 동쪽 수직굴 답사가 이어졌다. 수직굴은 이 때만 해도 제주에서는 처음 발견된 용암굴이었다. 당시 부종휴는 한라산우회를 오래도록 이끌고 있었는데 동굴답사가 한라산우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새로운 동굴이 발견되면 그 소식이 부종휴와 한라산우회로 전달됐고 목숨을 담보한 동굴답사가 계속됐다.
“동굴답사는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계속됐다. 부선생은 경제적인 면에는 워낙 둔감해 주머니가 항상 가벼웠다. 동굴답사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답사비용을 마련하느라 이 물건 저 물건 전당포에 맡겨졌고 배고픔에 지쳐 심지어 주인 몰래 찐감자를 챙겨 먹기도 했다.”(서재철·자연사랑 대표)
1971년 3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북제주군 애월 어음에서 길이 11.7km에 달하는 세계 최장의 굴 ‘빌레못굴’이 부종휴와 한라산우회에 의해 전격 발표된 것이다. 2년 뒤인 1973년에는 부종휴와 제주대 박행신교수 등에 의해 동굴내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동물뼈 화석이 발견돼 중앙 문화재위원들에 의한 긴급 발굴조사가 시행됐다. 이어 1975년 영남대 정영화 교수 등에 의해 구석기시대 유적 및 유물에 관해 종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특히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대륙성 동물 갈색곰 뼈의 화석은 현재의 제주도가 1만∼15,000년전 이전까지 한반도는 물론 중국대륙과 연결됐음을 시사해주는 것이어서 제주가 섬으로 바뀌기 이전의 문화변천 양상을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빌레못굴은 1984년 천연기념물 제342호로 지정됐다.
빌레못굴에서 발견된 고대의 유적과 유물은 부종휴의 관심을 고고학에까지 넓히는 동인이 되었다. ▷한림읍 금릉리 ‘한들굴’=반원형 석기, 토기파편, 골각기 등 발견(73년 7월) ▷용담동 ‘먹돌새기’=돌도끼 등 석기, 토기파편 20여점 발견(74년 1월) ▷구좌읍 서김녕=패총 발견, 석기 조개껍질 사슴이빨 등 30여점 수집(75년 1월).
이 즈음 그가 사글세로 살던 제주시 도남동 공무원아파트 단칸방은 섬 곳곳에서 수집해 온 석기시대 유물조각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곳에는 그 흔한 가재도구 하나 없었다. 부종휴의 삶이 그랬다.
1968년 ‘세기의 동굴결혼식’만장굴 전국명소로 부각
1968년 만장굴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국내 최초 동굴결혼식이다. 주인공은 신랑 부종휴와 신부 이정희. 주례는 만농 홍정표. 많은 제자와 동료, 친지들이 이 세기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들었고 방송, 신문들은 취재열기로 가득했다.
부종휴의 동굴속 세기의 결혼식은 원래는 강원도에서 열릴 뻔했다. 결혼식전 중앙일보에서 열린 한국동굴협회에 참석했던 부종휴가 회원들에게 결혼소식을 알리자 자연스레 결혼식장이 화제에 올랐다. 당시 모임은 강원도석탐암동굴답사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때 강원도 관음굴에서 결혼식을 하자는 제의가 나오고 주례에 그와 절친했던 식물학자 박만규교수까지 내정되는 분위기였다. 부종휴도 그러기로 이미 마음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에 있던 모인사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왜 자기가 발견한 만장굴을 두고서 강원도굴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는 것이냐. 만약 만장굴의 발견자가 그 굴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면 만장굴이 다시 한번 널리 알려지게 될 것 아니냐.”
부종휴는 훗날 “그때만 해도 못 마땅한 이야기였지만 나중에야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부종휴는 결국 만장굴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문화재관리국 인사의 예상처럼 만장굴 결혼식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만장굴은 관광명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부종휴는 왜 하필 만장굴 동굴속에서 결혼식을 올렸을까. 그 해답을 만장굴의 최초 발견자요 명명자가 바로 부종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강시영기자 sykang@hallailbo.co.kr
